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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랑 "손가락 인대 파열됐지만 가야금 명주실 놓지 않을래요"

“처음에는 출석만 부르고 나갈 요량이었던 학생들이 우리의 특강을 한 번 듣더니 가야금 소리에 푹 빠졌어요. 그 때 느꼈죠. 아, 내가 가야금을 들고 뛰는 만큼 가야금이 사랑받겠구나”

이사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상기된 얼굴로 가야금에 대해 설명하더니 쌍둥이 언니 이예랑과 함께 대학교에서 강연을 펼치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대한민국 가야금 가수 1호이자 쌍둥이 가수인 가야랑(언니 이예랑, 동생 이사랑)은 짧은 시간동안 가야금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을 전했다. 그동안 대중들이 알고 있던 가야랑은 고작 SBS ‘스타킹’, KBS 1TV ‘아침마당’, KBS 1TV ‘인간극장’ 등에 몇 번 출연한 적 있는 쌍둥이 가야금 가수가 전부일 터. 자칫 고리타분해 보일 수 있는 이들이 알고 보면 국내에 둘도 없는 ‘엄친딸’이라고 말하면 몇 명이나 믿겠는가?

가야금 연주가이자 현 대학 교수인 옥계 변영숙 여사의 딸로 태어난 이예랑-이사랑 자매는 한양대 국악과 교수, KBS 국악대상 수상자 등 국악계 인사인 이모들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럽게 가야금을 만지며 자랐다.

줄곧 가야금을 배워온 언니 이예랑은 최연소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당시 24세) 어린 나이에 레슨만으로 의사 뺨치는 수준의 돈을 벌었으며, 동생 이사랑은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성남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연습을 하겠다’ 이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어요. 가야금을 뜯다 보면 나무 무늬에 빠져드는 것 같고 특히 무대에 서면 캄캄한 우주에 가야금과 나만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양쪽 앞가슴 근육이 마비되고 엄지손가락의 인대를 싸고 있는 막이 파열돼 영구적으로 못 쓴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사람이 살면서 평생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제한 횟수가 있는데 보통은 다 쓰지 못하고 죽는 거였죠” (예랑)

자칫 장애인이 될 뻔 했던 심각한 상황을 떠올리면서도 가야금의 신비롭고 평안한 음색에 매료되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며 미소 짓는 이예랑. 알고 보니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약 2시간동안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주사약을 투여하고 콩쿠르에 나간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로 가야금에 손을 못 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다는 것. 이런 언니의 모습에 동생 이사랑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지만 내가 사사로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언니는 가야금,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어요. 나와 다른 언니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죠. 또 그에 걸맞은 연주 실력을 갖춘 언니가 자랑스러워요. 언니는 성음이 뛰어난 연주인이고, 내가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이미 국악계가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니까요” (사랑)

그래서 이사랑은 가야금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박물관 속의 국악기로 고고하게만 남아 있던 가야금이 이예랑을 만나 운 제대로 트였다고.

이예랑의 놀라운 재능은 당시 대통령상 심사위원장이었던 이지숙 서울대 교수도 알아봤다. 그는 심사 직전 “오늘 수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연주인이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됐다. 내가 그 연주를 심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영광이다”라며 극찬을 거듭했다. 이후 국악의 도시로 불리는 전주시 홍보대사로 임명된 가야랑은 이를 계기로 국악 TV 2MC로 약 2년간 활약하며 각종 방송에 출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하지만 가야랑은 한 번도 연예인을 꿈꾼 적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저희가 수려한 외모는 아니잖아요. 분수를 잘 알아요”라며 해맑게 웃던 그들이 사명감 넘치는 발걸음을 방송 무대로 옮긴 건 순전히 가야금 때문이었다.

“기존에 가야금이 설 수 없던 곳에, 더 나아가 우리 음악을 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어요. 가수라는 신분을 입으면서 가야금과 동행하니 이제는 어느새 서양 음악 연주자들이 뒤에서 백 뮤직을 깔아줘요. 그럴 때마다 묘한 감동이 느껴져요” (예랑)

가야금 대중화에 앞장서라고 누가 두 사람의 등을 떠민 건 아니었다. 햇수로 약 3년간 가야랑을 결성하고 달려오게 한 원동력은 ‘한 사람이라도 더 가야금을 접했으면 좋겠다’는 이들의 소신이자 소망이었다. 힘들어서 눈물이 날 때도 많았다. 그래도 평소 가야금을 접할 기회가 없던 대중들이 그 매력에 점차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 이상할 만큼 힘이 솟아났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야랑이 가야금 대중화에 앞장선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예랑은 국내 최고 가야금 연주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프라이드와 고고한 철학으로 가득 찬, 그저 ‘예술인’에 불과했다. 오히려 가야금의 대중화를 먼저 꿈꾼 사람은 언니가 아닌 동생 이사랑.

“언니, 액자 속에서 가야금을 꺼내. 액자 속 가야금은 너무 멋있지만 그 가야금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직접 들려주는 것은 언니의 몫이야. 그 소리를 듣고 싫어할 사람은 절대 없을거야. 난 언니의 연주를 믿어” (사랑) “내 가야금이 어떤 가야금인데 그걸 대중들에게 찾아가면서까지 들려주라는 거야?” (예랑)

그런데 국악이 도태되고 있는 현실이 방 안에서 자기 연습만 거듭하고 있는 연주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 계약을 맺은 기획사의 매니저로부터 사기를 당해 의도치 않게 연예계와 작별을 고하게 된 가야랑은 자신의 본래 자리였던 예술인,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SBS ‘진실게임’을 통해 인연을 맺은 SBS ‘스타킹’ 작가로부터 섭외를 받았지만 이예랑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그 학부모의 시선을 의식하며 단칼에 출연을 거절했다.

이에 늦은 밤 가야랑의 집으로 찾아온 작가는 가야랑의 인생을 바꿀 한 마디를 던졌다. “가야금의 대중화를 부르짖는 줄 알았는데 말로만 그랬군요”

결국 SBS ‘스타킹’ 출연을 결심한 가야랑은 동방신기, 샤이니, 씨엔블루 등 최고의 아이돌 그룹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안티팬들이 기승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들이 팬으로 돌아섰다고.

“가야랑이라는 팀명조차 싫어했던 안티팬들이 ‘가야금 X들’, ‘스타킹 가야금’ 등의 명칭을 사용했는데 청소년들이 은연중에 가야금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걸 보니 오히려 기뻤어요. 어느새 우리가 가야금과 동일시 돼 있더라고요.(웃음)” (예랑)

“최근에 또 ‘스타킹’ 녹화에 참여했는데 슈퍼주니어의 이특 씨가 가야금을 보더니 대충 손을 대 보고 쉬운 동요를 연주하셨어요. 예전에 ‘스타킹’에 출연했을 때는 대본상 샤이니의 민호 씨에게만 가야금을 가르쳐줬는데 당시 녹화가 끝난 뒤 이특 씨가 ‘나도 해 보고 싶었는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 모습을 보니 참 미안했어요. 붐 씨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언제 가야금을 만져보겠어요” (사랑)

‘가야금 전파’라는 외길을 위해 스폰서를 찾는 데에만 혈안을 올리는 거대 기획사의 달콤한 계약조건을 만류하고 그들에게 3년이나 진심 어린 러브콜을 던진 페이스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튼 가야랑. 외국 초청 공연이 있을 때마다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는 그들은 이제 ‘대한민국 가야금 가수 1호’를 넘어 우리 문화를 전파하는 ‘미니어처 대한민국’으로 성장했다.
가야랑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탈 것이다. 그들이 오늘 하루 또 어떤 성과를 거둘지,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먼저 가야금이 주는 감동과 음악의 힘을 믿고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 번은 우리의 연주를 들은 아주머니가 통곡을 하시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어요. 남편도 자식도 위로하지 못한 나만의 상처를 우리의 가야금 연주로 하여금 치유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만났다’며 고마워하시는데 온 몸에 전율이 왔어요. 가야금의 진실을 그대로 느껴주시는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한경닷컴 w스타뉴스 [양자영 기자/ 사진 이해강 인턴기자] --> 기사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