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악인 이야기

[전통을 이어가는 부녀ㆍ모녀] 함께라서 외롭지 않다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전통악기든 한국무용이든 옛것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니 맥을 이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전통을 외면한 채 퓨전, 창작으로 쏠리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진짜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전수받는 보기 좋은 부녀와 모녀가 있다. 물론 딸이 중간에 하기 싫다고 다른 길로 눈을 돌리던 방황의 시기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아빠 뒤에, 엄마 뒤에 내 딸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란다. ‘자기 자식 가르치기 어렵다’ 말이 무색할 만큼 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그들의 전통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채주병 프로필

■아빠는 거문고, 딸은 가야금


어릴 적 고등학교에 진학할 돈이 없어 학비, 교복, 책값이 공짜라는 국악고등학교를 택한 소년이 있었다. 악보를 볼 줄도 전통악기를 다룰 줄도 몰랐던 그가 거문고를 손에 쥔 지 언 40년, 경기도립국악단 수석악장 자리에 앉아있다.


그리고 아빠의 끼를 물려받아 가야금으로 그 어렵다던 한국예술종학학교에 입학해 올해 졸업반이 되는 딸이 있다. 바로 채주병(56), 채희선(24) 부녀다.

“아빠가 연주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그냥 멋있어요. 그리고 저도 몰랐는데요. 연주할 때 거울 속 제 모습이 아빠랑 똑같더라구요.(하하)”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희선씨가 처음부터 아빠의 뒤를 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야금을 배우다 당시 어린 마음에 아빠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가 지겨워 가야금을 손에서 놔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쯤 문득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가야금을 탔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릴 적 듣고 자랐던 게 있어서일까. 프로의 소리에 길들여져 귀 만큼은 국악에 열려 있어 감은 살아있었다.

몇 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가야금을 자신의 악기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최근에는 거문고 수업까지 들으며 아빠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채 악장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쭉 했으면 고생도 안 했겠지. 남들보다 가야금 연륜이 짧아 안쓰러운 마음은 있다”면서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만큼 열심히 해주지 않고 있다. 욕심을 좀 더 내줬으면 좋겠다”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김복련 프로필

■때론 ‘선생님’, 때론 ‘엄마’…승무 살풀이 전승 모녀


"엄마~ 엄마는 왜 외할머니한테 엄마라고 했다가,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왜 만날 달라?”

수원 화성 아래 자리 잡은 수원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승무와 살풀이에 매진 중인 김복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 예능보유자(65)와 신현숙 전수조교(44) 모녀의 웃지 못할 이야기다. 연습할 땐 선생님, 밖에서는 엄마. 6살 난 어린 아들이 봤을 땐 이상했을 법도 하다.

신 전수조교는 사실 무용과는 거리가 먼 공대를 나왔다. 물론 어렸을 적 무용을 배우긴 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다며 무용을 거부했다. 김복련 선생의 속은 타들어갔다.

내 딸이지만 무용을 안 한다고 해서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 나중에 내가 너무 힘들어서 엄마 좀 도와달라고 그랬어. 근데 하라는 무용은 안 하고 뒤에서 책만 보더라고. 어느 날 부채춤을 추는데 키가 큰 애가 갑자기 있는 거야. 그날을 계기로 딸이 내 뒤를 잇게 됐어.”

이렇게 속을 썩였던 현숙씨가 스물일곱 엄마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는 김복련 선생의 최고의 제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 선생이 故 이동안·정경파 선생에게 배워 온 화성재인청을 문서로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된 것. 현숙씨는 승무ㆍ살풀이를 지키겠다는 선생의 뜻을 헤아리고 자료를 찾고 가락을 표준화시키는 등 논문까지 써가며 묵묵히 일해왔다. 그 결과 김복련 선생이 지키고자 했던 ‘화성재인청’ 정리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