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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

판소리 손영준씨 “나이는 숫자에 불과, 목표의식 가진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다”




53세에 판소리에 매료된 손영준 씨는 그로부터 8년 후 어엿한 소리꾼으로 거듭났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더 열정적으로 판소리에 매진한다는 그는 판소리 전수에도 힘쓰고 있다.

소싯적에 판소리에 빠진 적이 있다. 문득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노래는 ‘사랑가’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할 나이었지만 판소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꺾기와 마음에 와 닿는 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집 근처 문화원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하지만 배움은 길지 않았다. 배우는 동안 즐거웠지만 판소리를 업으로 삼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열을 앓듯 두달 남짓한 판소리 사랑은 끝났다.

은퇴 후 판소리에 입문해 국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손영준 씨(61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17살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50세 넘은 나이에 이뤄낸 손 씨를 만나고 싶어 대전으로 날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대선을 하루 앞둔 18일 대전 자양동에 위치한 대전문화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은 대전문화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판소리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회색빛 개량한복을 말쑥하게 차려입는 손 씨와 그의 제자들이 취재진을 반겼다. 교통체증으로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도착해 아쉽게도 판소리교육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사철가에 이끌려 판소리를 시작하다

손 씨는 1974년 수협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지금과는 달리 첫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때라 그 이후 35년을 수협에서 보냈다. 수협중앙회에서 시작해 본점 영업부장을 거쳐 서초 지점장 등 순탄한 삶을 살았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지역본부장을 2번이나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년퇴직이 다가올수록 은퇴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당시 17년간 운동삼아 해오던 골프 외에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던 손 씨는 취미를 먼저 만들기로 했다. 때마침 먼저 판소리를 배우고 있던 지인의 소개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됐다.

그가 고향임 명창을 통해 처음 배운 판소리를 바로 사철가다. 손 씨는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며 헛헛한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사철가의 가사에 감동해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사철가에는 퇴직을 앞두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빠르게 매료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소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아주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은퇴 후 국악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은 그의 열정에 불을 붙였다. 그때부터 1년여간 한 달에 4회에 걸쳐 개인레슨을 받았다.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흥부가) 중 그가 첫 스승인 고향임 명창을 통해 배운 것은 춘향가다.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생활습관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퇴직 전이었던 만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출근 전 산에 올라가 1~2시간가량 연습을 했습니다. 또 선생님의 노래를 녹음해 출근하는 차안에서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목 관리를 위해서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17년간 치던 골프도 그때쯤 그만뒀습니다. 오직 판소리만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판소리 사랑은 퇴직을 1년 앞당기게 했다.

“정년퇴직을 1년 앞두고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죠. 당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주봉신 선생님을 두 번째 스승으로 모시고 주말마다 전주에 내려가 고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결정을 내렸죠.”

판소리 고법은 고수가 북장단을 치는 방법을 말한다. 손 씨는 이때 판소리고법과 함께 수궁가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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