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악인 이야기

무용계의 중추적 기둥'채상묵'한국전통춤협회 이사장



승무 동영상

채상묵(蔡相默·Chae Sang Mook)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1944년 11월 4일 전주시 전동에서 부친 채기동과 모친 정옥녀의 4남 6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말, 암울한 현실과 아름다운 자연을 동시에 체험한 그는 포근한 성품에 어울림과 신의를 중시한다. 채상묵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무용계의 중추적 춤꾼이다.

고사리 같은 심성으로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57년 졸업) 2학년 재학 당시 교사였던 고(故) 임성남(전 국립발레단 단장) 선생의 지도로 학예회에서 ‘꽃과 나비’에 출연, 그 유희적 무동(舞動)을 시작한다. 그 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의 재능이 유별남을 그의 스승은 바로 알아챈다. 예향(藝鄕)에서야 가능한 그의 수업시대는 설득과 지원이 뒤따른다.

   
▲ 84공간속의 나 099
채상묵은 전주북중 3학년 재학 시 최선(전북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무용연구소에 입소, 본격 무용 수업에 들어간다. 이어 강선영(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 이매방(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에게 사사하며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을 이수하였다.

1959부터 1963년까지 전주 최선무용공연의 ‘장고무’, ‘춘향전’, ‘선(線)의 유동’등에 다수 출연하였고, 1964년 11월 명동국립극장에서 강선영 안무의 ‘법열’에 출연하였다. 명동 국립극장 시절, 1964부터 69년까지 국립무용단 단원 정기공연 ‘배신’, ‘열두 무녀도’, ‘모란의정’등에 출연, 일찍부터 그의 이름을 무적(舞籍)에 등재하였다. 1969년 강선영안무의 ‘수로부인’(명동 국립극장)에 출연하여 그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1964년 서라벌예대 무용학과에 입학하며 미국 퍼시픽 웨스턴 대 체육교육과,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에서 ‘이매방 승무의 북놀이 리듬채보’로 체육학 석사학위를 취득, 한국무용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중진으로 깊은 영감과 심오한 사상, 현실 고발적 메시지를 춤으로 전달하며 전통과 창작 춤의 승계와 어우러짐을 위한 실험적 춤 언어 개발을 선도하는 안무가이자 교육자다.

그는 20대부터 전통춤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오늘날까지 연구에 매진하여 왔다. 그간 다루었던 그의 창작 춤은 주체적·독창적인 작품이었으며, 전통적 민족성과 창작의 구도적 성향을 접목, 예술적 이미지로 형상화 해왔다. 그는 우리 춤 정서의 원형보존과 창작의 경계를 허물며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작품을 표출해낸다. 특히 그의 ‘승무’는 명무로 인정받고 있다.

‘맹안의 소녀’(76), ‘연화의 정’, ‘공간+나’(81), ‘머물러있는 혼(魂)’(83), ‘한 마리 학(鶴)이 되리라’(84), ‘혼(魂)이 흔들리는 몸짓’(89), ‘마른풀꽃의 소리’(90), ‘혼(魂)의 울림’(91), ‘북사위와 춤소리 40년’(98), ‘시인의 여정’(01), ‘가사(袈裟)입은 허수아비’(03), ‘누가 아름다운 학의 눈물을 보았는가’(06), ‘예인의 흔적’(09) 등은 그의 삶에 대한 회한과 슬픔을 표현하는 안무작들로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예술가의 희로애락을 춤 작품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 연리극
불교철학과 선(禪)사상의 진리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비로자나불(佛)에 관한 명상’(87), ‘회심곡’(93), ‘고이 접어서 나빌래라’(98) 등이 있다. 그의 크로스 오버는 서양의 현대음악(Vangelis의 ‘차이나’)과 대중가요(김수희의 ‘님’)를 수용, 춤과 접목했던 ‘공수래 공수거’(85), ‘님’(87), ‘금강’(94) 등에 걸쳐있고, 초월적 정신성과 제의적 춤의 새로운 해석으로 무용계에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서울시무용단 정기공연 ‘지신님 지신님’(85), ‘연리근’(07), 서울시가무단 정기공연 ‘성춘향’(84~86), ‘바다를 내품에’(87), ‘꼴방지전’(90), 국립창극단 정기공연 ‘심청전’(05), 한국오페라단 정기공연 ‘황진이’(00), ‘오페라 갈라공연’, 광주시립국극단 정기공연 ‘이진사전’, ‘배비장전’, ‘강능매화전’, 정읍국악원 정기공연 ‘정읍사’, 인천광역시립무용단 ‘3고무, 5고무’, ‘두드리라’를 안무, 전 방위적 안무가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창무 극단의 ‘얼레야’, ‘아라 아라’, 극단 사조의 ‘다녀오겠습니다’, 극단 대중의 ‘선녀는 땅위에 산다’, 극단 성좌의 음악극 등과, 정동극장 예술단 민속무용 안무를 통해 춤의 연희성에 집중하는 등 춤과 타 장르간의 소통, 협업, 협연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의 춤정신과 사랑하는 대나무의 푸른빛은 어디에 있어도 그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 2009 예인의 흔적 '한량무'
서울예술단의 정기공연 성춘향(94) 객원 안무 이래, 이 단체의 무용감독으로 재직(2002~2004)하며 ‘고려의 아침’(02), ‘해어화’(02), ‘7고무’, ‘홍랑 그 애닮은 사랑’(03), ‘소용돌이’, ‘풍속도’, ‘농가월령가’ 등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하는 가무악(歌舞樂) 작업을 무용 예술화하여 공연하였다. 그가 데뷔한 이래 가장 창작적인 작업을 펼친 시기가 아닌가 싶다.

98년 ‘춤인생 40년’이라고 본인이 타이틀을 걸었던 채상묵은 70년대 중반, 남성무용수들의 춤 운동의 핵심적 인물로 현재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 60여 개국에 우리의 ‘승무’를 중심으로 민속춤의 예술성을 투사하며 문화 사절로서의 역할도 성실히 해오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그의 ‘승무’가 가장 많이 초청되어 공연되고 있다. 춤 운동, 원형의 보존과 춤 창작, 춤 교육, 춤 외교에 걸친 그의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예종 무용원 겸임교수(1997~2011), 국립국악원, 국립극장, 성균관대, 명지대, 세종대, 한성대, 원광대, 대진대, 한양대, 경희대 등의 무용과에서 후학들에게 항상 ‘마라토너의 정신’으로 연습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춤에 모든 것을 걸 줄 아는 춤꾼으로 성장해야 함을 강조해왔다. 한국 전통춤의 보존과 전승 및 진흥을 위한 한국전통춤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으로서 우리춤 전승에 열정을 아끼지 않는 채상묵은 춤을 지도하며 공연하고 있다.

관련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