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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

열여섯 김매자, 무엇을 봤길래 넋이 나갔나



김매자 프로필  

아무튼 수상쩍은 곳이었다. 건물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낯선 음악이 귀를 자극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건너온 음악이겠지. 그런가 하면 익숙한 장구 소리도 더러 들리는 것이었다. 저긴 대체 뭘 하는 곳일까? 누가 있는 거지? 집으로 가는 길에 늘 지나치다 보니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들어가 볼까 말까 망설이길 며칠. 그날만큼은 어쩐지 용기가 났다. 단짝친구와 함께 2층에 올라서자 ‘신무용연구소’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목재 문의 작은 창 너머엔 그야말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몇몇 아이는 망측하게도 몸에 딱 붙는 흰색 상·하의 차림이었다. 분명 겉옷은 아닌데, 그렇다고 속옷이랄 수도 없었다. 엉덩이에 걸친 짧은 치마는 앙증맞았다.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다리를 앞으로 들었다 옆으로 폈다 했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한쪽에선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부채춤을 추고 있었다. 열여섯 김매자(69·창무예술원 예술감독·사진)는 넋이 나갔다.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창극(唱劇)은 그 순간에 촌스러운 퇴물이 돼 버렸다. ‘춤을 춰야겠구나. 저런 춤을.’ 1959년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전쟁의 아픔
그는 두부나 묵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이 남긴 생채기다. 가족은 강원 고성군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나자 고향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몇 개월이 지나 국군이 들어왔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듬해 1월 국군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났다.

작은오빠(큰오빠는 서울 유학 중 입대)와 피란을 떠났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가겠다”며 하루 만에 돌아왔다.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을 환영했던 경력이라면 탄광에 끌려가고도 남을 터였다. 살아야 했기에 가족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 남자 내복 까만 물들여 콩쿠르 나가고 대입도 봤다 ▼

■ 무용가 김매자의 삶을 바꾼 순간

겨울 산중엔 늘 먹을 게 부족했다. 도토리묵만 지겹도록 먹었다. 도토리가 채 불기도 전에 묵을 쑤다 보니 맛도 없었다. 나중엔 비슷한 것만 봐도 신물이 났다. 얼음이 녹아 한시름 놓을 때쯤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돌았다. 어머니와 큰언니만 빼고 아버지, 둘째 언니, 작은오빠, 매자,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모두 앓았다. 다들 고비를 넘겼지만 막내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매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신을 안고 문 밖을 나가다 멈추고는 동생을 대신 데려가는 꿈을 꿨다. 동생은 이튿날 깨어나지 않았다.

슬픔에 젖을 겨를도 없었다. 삶은 참 잔인했다. 동생이 죽었기에 가족은 탈출할 수 있게 됐다. 아기를 데리고 북한군의 눈을 피할 순 없었으니까. 그 어린것을 차디찬 땅에 묻고 가족은 고향을 떠났다. 하루를 꼬박 걸었다. 강을 건넜고, 북한군 초소 옆을 쥐죽은 듯 지나쳤다. 어두워지니 목표물 없는 총알이 날아다녔다. 밤만 되면 서로가 위협사격을 한다고 했다. 따끈따끈한 총알이 무수히 스치는데도 가족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굴속에서 밤을 새운 뒤 국군을 만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외삼촌이 있던 영월군 상동읍에 도착했다. 매자는 어린 동생의 도움이라 확신했다. 재산을 숨겨놓은 장소로 잘못 알고 누군가가 동생 묘를 파헤치지나 않았을지 자꾸 북쪽을 바라봤다. 그런 기억들은 훗날 무용 작품인 ‘얼음 강’(2002년)으로 만들어졌다. 예순의 매자는 몸으로 울며 동생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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