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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

국악계 거장 박범훈 “공급과잉, 자리 부족, 전공기피 국악교육 3중苦, 악순환 거듭”



박범훈 프로필

12월 4일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연풍문 2층 소회의실. 각 잡힌 정장 스타일을 고수하는 청와대 사람들의 평균 이미지와 달리 머리가 허옇게 세고 차림새도 헐렁한 한 남자가 들어섰다. 2011년 2월 중앙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 이곳에 입성한 박범훈 교육문화수석비서관(65)이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박 수석은 국내 최초로 국악 관련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86아시아경기대회·88서울올림픽·2002한일월드컵 등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적인 행사의 음악총감독을 맡은 국악계의 거장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국악 작곡가이자 1981년 ‘허생전’을 시작으로 마당놀이를 국민축제로 일군, 국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런 명성의 주인공이니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친 근엄한 모습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 처음 대면한 그와의 거리감을 단숨에 잊게 했다.

음료를 시켜놓고 기다리면서 인사를 나누던 중 그가 불쑥 물었다. “근데 취재하려는 내용이 뭐라고 했죠?” 섭외 과정에서 충분히 취지를 설명했는데 재차 답을 구하는 것은 방향을 명확히 해두려는 의도일 터.

▼ 국악이 양악(洋樂)에 비해 홀대받고, 일자리도 별로 없고, 대학 국악과 수도 계속 줄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러다 국악의 맥이 끊어지면 어쩌나, 우려하는 국악인이 적지 않다. 위기를 맞은 국악의 명암을 짚어보고자 한다.

“좋은 주제다. 타이밍도 적절하다.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는데 국악인이 많이 배출되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전통예술 분야에 많은 지원을 해주는 나라도 드물다. 일본에는 일본 전통음악 하는 악단에 월급 주는 기관이 NHK 하나밖에 없다. 우리보다 전공자가 서너 배는 더 많은데도 다 잘 먹고 잘산다. 왜냐? 사회가 받아준다. 그만큼 일자리가 있다는 거다. 또 일본 전통음악 종사자는 해외에 많이 진출해서 외국인에게 기모노 입혀놓고 자기네 춤 가르치고 그런다. 누구보다 국악인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 전공자라서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거다. 국악인 만나면 왜 우릴 안 도와주느냐고 한다. 근데 생활 속에서 대중이 함께하려고 하지 않으면 억지로 안되는 거다.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는데 안에서만 돌파구를 찾으려 하니 당연한 결과다.”

국악 홀대하는 정서 안타까워

▼ 국악인만 노력해서 될 일인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국·공립 예술공연단체를 장르별로 분석한 2011년 자료에 따르면 양악공연단체가 179개인 데 국악공연단체는 60개에 그친다. 이 때문에 국악 전공자의 일자리 부족 현상이 더 심해진다는 주장이 나온다.

“국립 국악공연단체는 이미 여러 개가 있다. 공립 국악공연단체를 늘리는 것 역시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자체 예산이 부족한데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요할 순 없다. 또 국악공연단체가 많아진다고 해도 일자리 수급이 원활하지는 않을 거다. 국가와 지자체에서 만든 국악단체에 들어가야 국악 활동을 제대로 하는 것처럼 인식되다보니 기를 쓰고 들어가서 절대 안 나온다. 실력 있는 젊은이들은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간다. 그러니 아무리 많이 생기면 뭐 하나. 순환이 안 되는 걸. 월급이 꾸준히 나오니 실력은 안 키우고 악단마다 노조 만들어서 자기 밥그릇만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갈수록 나태해지고 만날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다. 예술 하는 사람들이 그러면 쓰나.”

▼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해도 졸업 후 노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인가?

“전국 22개 국악과에서 배출하는 졸업생 900명 가운데 60%는 초·중·고교 국악강사나 예술 관련기관에 취업하고 20%는 대학원 진학, 남은 20%는 군 입대를 선택하거나 취업을 준비한다. 사실 공무원이나 회사원처럼 어디에 들어가서 월급 받을 생각으로 국악 전공한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전공 살리며 사회봉사를 하고 싶어도 우리 사회가 수용을 못하니 결국은 다 실업자가 되는 거다. 원래 예술가는 직장을 가지려는 부류가 아닌데 지자체나 민간이 운영하는 공연단체에 들어가야만 취업이 됐다고 보는 건 잘못됐다. 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든지, 초등학교 수업에 참여한다든지, 학원을 한다든지, 개인적인 공연을 한다든지, 이런 게 원래 정상적인 활동인데 아직은 우리 사회가 대학에서 배출하는 국악 전공자를 모두 수용하기는 힘든 실정이다.”

▼ 결국 공급 과잉이 문제인 건가?

“공급도 과잉이고 일자리도 없고 국악 입지는 자꾸 좁아지는 총체적 악순환이다. 국악을 전공해도 할 일이 없으니 국악 안 시키고 그래서 국악과가 인기가 없으니 지방대학부터 문 닫고 그러는 거다. 이런 현상이 날로 심해지는 게 앞으로 큰 문제다. 이제 기업이라든지 사회에서 양악뿐 아니라 국악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활성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악단이라는 게 인원이 한정돼 있어서 공연단체만 많이 만든다고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국악 공연을 꾸준히 열 수 있고 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건 국가나 지자체만의 노력으론 안 된다.”

▼ 같은 기관에서 소속 단체의 장르가 국악이냐, 양악이냐에 따라 단원 급여에 차등을 두는 건 문제가 아닌가?

“지자체들이 1980년대까지는 차별을 심하게 했다. 이후 국악인들이 들고 일어나 많이 개선된 것으로 안다. 지금은 국악, 양악 가르지 않고 모든 단원에게 공무원에 준하는 연봉 책정 기준을 적용해 차등 없이 대우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도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 거다. 100% 고쳐져야 한다. 만일 정부 차원에서 조사해서 계속 차등을 두는 곳이 있으면 시정조치 하겠다.”

▼ 기업 행사나 후원 공연에서도 서양음악가가 국악인보다 후한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나도 겪었다. 예전에 한 공공기관 행사에 갔는데 나하고 안숙선에게는 개런티로 100만 원씩 주고 서양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조수미에게는 1000만 원씩 주더라. 우리도 나름대로 국악계에선 톱클래스인데 양악과 국악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나 싶어 굉장히 불쾌해 따졌더니 국악인은 부르면 금방 오는데 그쪽은 튕긴다고 하더라. 그래서 출연료를 더 높였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했다. 공무원의 사고방식이 이 정도니 기업은 오죽하겠나. 이런 인식은 잘못된 거다. 빨리 버려야 한다. 앞으로는 기업이 국악 공연도 적극 지원했으면 한다. 그런 메세나 활동은 기업의 이미지도 좋게 만들고 국악의 건강한 발전에도 기여하는 윈윈(win-win)의 모범사례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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