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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

판소리·가야금 명인 강정숙 "藝人의 자존심은 연습량이 말한다"



 

강정숙 프로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주택가.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이 애잔한 가야금 선율을 타고 골목길을 흐른다. 여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떨어지는 복사꽃처럼 흩어진다. 지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가락에 귀를 기울인다. 때론 어깨를 들썩이기도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듯 심심찮게 우리 가락을 제대로 듣는 호사를 누린다. 건물 4층에 있는 사단법인 가야금병창보존회 덕분이다.

가야금병창보존회를 이끄는 강정숙(61) 용인대 국악과 교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및 산조 보유자다. 1970~80년대 창극계의 프리마돈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판소리 명창' '가야금산조 명인' '가야금병창 명인' 소리를 함께 듣는 우리 국악계의 독보적 존재다.


환갑을 넘겼지만 가야금 타는 자태는 여전히 고왔다. 명주실 가야금 줄을 누르는 왼손가락 끝엔 팽팽한 긴장이 흘렀고, 오른손가락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줄 위를 날아다녔다. 그의 스승 향사 박귀희가 "한 포기 고귀한 난처럼 곧은 듯 부드럽고 섬세한 음률의 소유자"라고 한 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는 "요즘은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지금 내게 배우는 제자들은 축복받은 것"이라며 웃었다.

사무실은 젊은 여성들로 붐볐다. 제자들이라고 했다. 국악 침체기라고 하지만 그의 음악을 전수받으려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제자들이 호리호리하고 미모가 뛰어났다. "외모로 제자를 뽑는 모양"이라고 하자 "아무래도 무대에 설 사람이기에 외모도 본다"고 했다. 보기에 아름다우면 연주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國唱을 만나다

국악과 인연이 닿은 것은 10대 시절이다. 하루아침에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님이 고향 경남 함양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이주했다. 예향(藝鄕) 남원은 우리 전통예술의 산실.

"광한루 근처에 살았는데, 스피커에서 하루 종일 판소리 '춘향가' 가락이 나왔어요. 아버지가 임방울 선생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국악과 인연이 많았는데, 언니(강문숙)에겐 판소리, 저한테는 한국무용을 배우게 하셨죠."

언니가 남원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어린 강정숙은 문밖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혔다. 그의 소리를 들은 남원국악원 김영운과 강도근이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권했다.

어렸어도 열정은 대단했다. 판소리를 배우는 한편으로 강순금에게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를 익히는가 하면, 원광호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우기 위해 광주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텔레비전에서 가야금산조의 대가 공철 서달종의 연주를 듣고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냥 좋았어요. 뭐든지 한번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정도가 돼야 그만두는 성격이에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느 날 '내 소리'가 귀에 들리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너는 절대 국악을 그만두지 말라' '넌 대성할 것'이라며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것도 큰 힘이 됐죠."

그의 인생을 바꿀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974년 문공부 주최 제1회 전국판소리 명인명창대회가 남원에서 열렸다. 전국의 소리꾼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그는 3등을 차지했다. 1등은 그보다 13세 위인 조상현 명창이었다. '국창(國唱)'으로 일컬어지는 만정 김소희가 심사위원으로 그를 지켜봤다. 어리지만 소리의 위아랫목을 다 갖추고 있음을 알아본 김소희는 그를 서울로 데려가 자기 집 아랫방을 내 줬다. 제자로 삼은 것이다.

서울에서 그는 온종일 뛰어다니며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박귀희에게 가야금병창을, 한영숙과 이매방에게 춤을 배웠다. 공철 서달종에게선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하나같이 국악계의 거목들이었다. 이들의 강습소가 창덕궁 앞에서 단성사 사이 골목에 모여 있을 때라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들 어찌나 사랑해주시고 정성으로 가르치시는지 힘든 줄도 몰랐어요. 예인이 누리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이 스승 복이라는데, 저는 인간문화재급 스승들의 향기를 듬뿍 쐴 수 있었으니 엄청난 행운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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