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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홍성덕

‘여성국극의 화려한 부활, 평생의 꿈이죠’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홍성덕 이사장 (2009년 기사)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진 것만 같은 여성국극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이가 있다. 지난 추억 속의 문화가 아니라 다시 도약하는 대중문화로서 여성국극의 건재함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한 예인(藝人)이 있다. 그녀가 바로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홍성덕 이사장이다.

TV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이전, 여성국극은 영화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대중문화 예술이었다. 여성국극이 펼쳐지는 극장에는 관중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여성국극인들은 지금의 아이돌 스타들 못지않은 열성적인 팬들을 거느린 국민적인 스타이기도 했다. 특히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여성국극 배우들의 인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분명 여자인 줄 알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에, 그들의 소리에, 그들의 능란한 춤사위에 소녀들은 남루한 현실을 잊고 아련한 환상에 빠지곤 했다.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 문화

“한번 무대를 본 이들이라면 여성국극이 보여주는 그 묘한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임춘앵 김경수 박미숙 씨 등은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죠.” 판소리 김옥진 명창의 딸로 태어나 일찍부터 판소리에 그 재능을 인정받았던 소녀 홍성덕도 그랬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공연에 금세 넋을 잃고 말았다. “판소리만 하다가 20대에 갑자기 여성국극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여성국극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매력이 잊혀지지 않아서였죠.”

1967년에 여성국극 ‘선화공주’에서 선화공주 역을 맡았던 그녀다. 하지만 여성국극 활동도 잠시, 그녀는 다시 판소리의 길로 돌아가고 만다. “여성국극은 소리와 춤, 연기가 모두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죠. 어느 하나만 뛰어나다고 해서 잘한다고 할 수 없어요. 제가 다시 소리 공부에 매진하게 된 것은 하나라도 우선 제대로 해내고 싶어서였어요.” 그녀가 한창 소리 공부에 빠져 있을 때 여성국극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TV와 라디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은 TV 드라마나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웃고 울었다.

그대로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때부터 그녀는 직접 발로 뛰며 예전의 명창들과 여성국극인들을 찾아 나섰다. 사라진 것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금 부활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노력을 바쳤다.

그 노력이 하나의 결실을 보기까지에는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예전의 여성국극인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진 인재들을 발굴하고 가르치고 또 공연을 준비하기까지에 걸린 시간이었다. 그 사이 1981년에 남원 전국국악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명창으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1987년 국립극장 대극장에 직접 제작한 ‘선인 이차돈’이라는 작품을 올렸어요. 그때의 감격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그 후로도 공연은 계속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축하 공연을 비롯해 매년 한 편 이상의 정기 공연은 물론 수십 회의 공연을 펼쳐나갔다. 1990년의 일본 오사카 초청 공연을 비롯해 해외 공연도 수없이 많이 다녔다. “1년에 한두 번씩 해외 공연을 나가는데 한 번 해외 공연을 나가면 30~40개 도시를 순회공연하곤 했죠.”

특히 1996년에 호주 시드니 오페라 대극장에서 공연한 일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국내에서 시드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팀은 많지만 거의 대부분 소극장 공연이죠. 대극장에서 공연한 건 우리밖에 없을 걸요?”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시드니 오페라 대극장에서 공연하기 위해 준비하던 그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2000년에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때 축하 공연을 한 일이나 평양에 가서 공연한 일도 잊지 못하는 공연 중 하나라고 한다.

2009-07-14 한경매거진 --> 해당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