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춘 고전문화원 이사장
경춘고속도로 서종 나들목을 빠져나온 차가 북한강을 따라 내려간다. 오후의 햇살은 북한강을 길게 따라가며 수면 위에서 산들산들 부서지고 있는데, 강가의 초목들에는 푸른 물이 올라오고 여기 쪼끔, 저기 쬐끔 꽃망울도 터지고 있다. 올겨울 동장군은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오는 봄을 막아서며 그리 까탈을 부렸지만, 이제 봄은 이렇게 오고 있다. 서종중학교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푯대봉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능선 자락에 날렵하게 처마를 들어 올린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지금 찾아가는 권오춘 고전문화원 이사장이 자랑하는 우리 한옥 ‘초은당’이다. 북한강변을 벗어나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오르막을 오르니 눈앞엔 초은당이, 그리고 그 앞에서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권오춘 이사장의 한복이 여전한 모습으로 소맷자락을 살랑거리며 나를 맞이한다. 권이사장님과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고 지도자 과정(ALP) 6기를 같이 수학한 동기간이다.
양 : 안녕하세요? 권이사장님의 한복은 언제 보아도 기품이 있고, 선비의 멋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 기억에 권이사장님이 양복 입은 모습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언제나 이렇게 한복을 입고 다니시지요?
권 : 그렇습니다. 운동을 하거나, 양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늘 한복을 입고 다니지요.
양 : 언제부터 그렇게 한복을 입고 다니셨습니까?
권 : 제 고향이 전통과 유학의 고장 안동 아닙니까? 제가 또 안동 권씨 후손이구요. 그래서 평소에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불교, 유교, 도교의 경전과 기독교의 신구약 성경 등을 들고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집중적으로 고전을 읽으며 더욱 더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깨달았는데,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항상 한복을 입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저도 그때부터 일상생활에서 늘 한복을 입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양 : 한복을 입으니 좋은 점은 무엇이던가요?
권 : 넥타이로 목을 죄는 양복보다는 한복이 훨씬 편하지요. 그리고 한복을 입으면 이 한복과 살아온 조상들과 교감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에 한복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언행을 조심하게 됩니다. 특히 저는 안동 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서 한복을 입으면 더욱 더 조상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에 맞추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양 : 요즈음 모 일류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 입은 여자의 출입을 거부하였다고 하여 비난을 많이 받고 있는데,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뭔가 불이익을 받았다던가,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나요?
권 : 저는 오히려 한복을 입음으로 더 대접을 잘 받았으면 잘 받았지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습니다. 저도 그 호텔에 한복을 입고 여러 번 식사하러 갔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는데, 어떻게 하여 그런 일이 생겼는지 어이가 없군요. 저도 처음에는 제 아내가 영감님 하고 사는 것 같다니, 딸 혼삿길 막힌다니 하면서 한복 입는 것을 반대했지만, 오히려 이런 분 딸이라면 며느리 삼겠다는 분도 있었고, 음식점에서도 서비스가 더 좋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제가 한복 입고 다니는 것이 많이 알려져, 한복 패션쇼 하는 곳에서 저보고 모델로 서줄 수 없겠냐는 요청도 들어오더군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한복이야말로 오히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브랜드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광복절 행사와 같은 정부 공식행사에서 정부 요인들이 적극적으로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통령도 외국을 방문할 때에는 우리 전통 한복을 입어 세계에 우리의 한복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푯대봉을 오르기 위해 권오춘 이사장이 산을 오르기 위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푯대봉의 능선은 초은당 위로 길게 서종면 사무소 쪽으로 내려가 한강에 코를 박고 있는데, 제대로 된 등산길은 그 능선의 끝자락에서 푯대봉으로 오른다. 우리는 그쪽으로 돌아가는 수고를 아끼기 위해 곧장 초은당 뒤편의 작은 계곡을 건너 능선에 붙었다. 가파른 능선에는 메마른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 조금만 방심하여도 발밑은 자꾸 미끄러져 내린다. 길 없는 능선 사면을 오르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고생하니 길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미 사람들이 오랫동안 지나지 않은 듯, 길 위에는 낙엽들이 한 겹, 두 겹 차곡차곡 덮어 길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중이었다. 점점 더 숨이 흐트러져 갈 때 능선 위로 올라 설 수 있었다. 그동안의 가파름에 조금은 쉬어가라는 배려인지 아직 능선은 소의 등처럼 완만히 오른다. 능선의 좌우로는 진달래꽃이 한창 물이 올랐다. 붉음을 머금은 보라색의 진달래꽃은 여럿이 같이 모여 그 보라색을 흐드러지게 뱉어내지 않고, 저마다 조금씩은 사이를 두면서 보랏빛의 소박한 향연을 펼치고 있다.
양 : 아까 보니까 초은당 앞마당에선 공사가 진행중이던데요?
권 : 초은당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조경을 더 하려고 마당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문과 담장도 더 바깥으로 보내고, 마당을 넓히려고 축대도 다시 쌓았습니다.
양 :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초은당은 참 튼실하게 지어, 다른 어느 한옥보다도 세월의 힘을 오래 이겨낼 것 같습니다.
권 : 예, 초은당은 봉정사 극락전 등 국보급 문화재를 생생히 복원해낸 인간문화재 74호 최기영 대목장이 지었습니다. 여기에 칠장 중요무형문화재 113호 보유자인 정수화씨가 옻칠을 하였는데, 마룻바닥은 무려 아홉 번, 기둥은 다섯 번 칠하고, 이외에도 벽과 문, 천장, 외벽까지 옻칠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배치한 가구까지 모두 옻칠을 하여 다른 한옥보다 오래오래 가도록 튼튼하게 지은 것이죠. 그리고 원적외선이 진흙보다 수십 배나 나온다는 옻칠을 여러 번 하여 건강에도 좋구요.
양 :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권이사장님으로 하여금 한복을 입게 하고, 또 한옥을 짓게 하였군요?
권 : 제가 지은 것은 아니고, 원래 문화재전문위원이자 명지대 공예학과 홍은옥 교수가 박물관으로 준비한 것을 2003년 제가 인수하여, 제 호 초은(招隱)를 따라 초은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한눈에 마음에 들어 두말 않고 인수하였지요.
양 : 한옥의 좋은 점이 무엇이던가요?
권 : 한옥은 온돌이라는 북방문화와 마루라는 남방문화를 동시에 포용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한옥은 나무와 흙으로만 짓고, 기둥을 이을 때도 쇠못 하나 사용하지 않기에 한옥이 해체되어도 오염되는 것 하나 없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콘크리트 건물은 어떻습니까? 아파트나 빌딩 하나 해체하면 건설 폐기물이 많이 나와 이를 처리하는데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 한옥이 좋은 것은 집 안팎으로 바람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거문화를 점령한 아파트는 창문을 닫고 문을 닫아걸면 바깥과 통하지 않는 폐쇄의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한옥을 보십시오. 한옥은 흙벽을 사용하기에 미세한 흙벽의 구멍으로 바람이 통합니다. 벽이 숨을 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옥은 문 하나쯤은 약간 헐렁하게 하여 바람이 통하게 하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옥에 살면 감기에 덜 걸린다고 합니다. 또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앉아있는 한옥은 앞문이 크고 뒷문이 상대적으로 작아, 산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작은 뒷문으로 들어와 앞문으로 빠져나갑니다. 그러므로 한옥에 산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또 한옥의 좋은 점에 대해 더 말씀드린다면 마루입니다. 한옥에서 마루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십니까? 마루는 방과 바깥의 두 공간을 조정하는 기능입니다. 양옥은 문을 열면 그냥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나, 한옥은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마루라는 조정 공간을 거쳐 나갑니다. 처마는 또 어떤지 아십니까? 처마는 방안의 공기가 나갈 때 일단 붙들어두고, 또 직사광선을 막아줍니다. 이렇듯 한옥은 과학입니다. 그뿐입니까? 한옥의 기와지붕의 선의 아름다움은 또 어떻습니까? 중국의 지붕 곡선은 너무 휘어져 올라가고, 반대로 일본의 지붕 곡선은 밋밋하게 내려감에 반하여. 우리 한옥은 그 지붕의 선이 내려가다가 부드럽게 살짝 치켜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멋을 줍니까? 게다가 비가 올 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 소리는 그대로 하나의 자연 음악이지요.
권이사장님의 열띤 설명을 듣자니, 문득 여름에 한옥에 누우면 뒷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시원하게 내 몸을 만지며 앞문으로 나가던 느낌이 되살아나고, 비가 주룩주룩 올 때 처마 끝에서 낙숫물 떨어지던 소리가 정겹게 귓가를 살랑거리는 것 같다. 한옥이 그렇게 좋은 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아파트의 편리함에는 따라올 수 없지 않을까?
권 : 한옥에서 살다보면 처음에는 좀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함은 이내 익숙해집니다. 오히려 아파트의 편리함은 인간을 게으르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편리함은 인간의 몸과 마음, 정신과 사상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한옥이 불편하다고 하는데, 한옥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개선하여 그 불편함을 줄일 수 있습니다. 초은당도 건물 안에 화장실과 욕실이 있습니다.
양 : 요즈음 한옥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은당도 그렇지요?
권 : 한옥이 좋다는 것은 외국 사람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개발업자들이 종로구 가회동의 북촌마을을 개발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북촌 한옥 보존운동을 벌인 것도 외국인이지 않습니까? 초은당에도 콜럼비아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외교사절들이 방문하였으며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초은당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경호 문제 때문에 아쉽게 포기하였죠.
양 : 저도 전에 초은당에서 입춘맞이 굿 행사를 하는 것을 본 생각이 나는데, 초은당에서 공연도 많이 하죠?
권 : 예, 1년에 몇 번씩 국악인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합니다. 공연뿐만 아니라 지식인 학자들의 연찬회도 열고, 외교사절 부인들이 초은당에 와서 송편 빚기, 한복 입기 행사도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국악인들이 여기를 연수원으로 쓰고 싶다고 하고, 무용가 홍신자씨는 명상센타로 쓰고 싶다고 하고, 또 내 친구 한의사는 초은당 옻칠의 효과를 보고자 여기 와서 아토피 치료를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그런가 하면 초은당을 예식장으로 빌려 달라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양 : 고향 안동에도 한옥이 있다면서요?
권 : 예, 하회마을에서 자동차로 7분 정도 거리의 고향 안동 풍천면 구담리에도 400년 가까이 된 한옥 구담정사(九潭精舍)가 있습니다. 원래 광산 김씨 남한공 종택이었는데 제가 2000년에 이를 매수하여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복원시키고는 구담정사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2007년에는 어머님 미수(88세) 생신 잔치를 구담정사에서 하면서 국악인들을 초청하여 ‘구담무담(九潭無譚) - 잃어버린 잔치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큰 잔치를 벌였는데, 영남 춤꾼 박경랑님, 호남 춤꾼 김운태님, 가야금산조 김무길 명인 등 국악계의 많은 명인들이 오셔서 잔치를 빛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명인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안동 엠비시(MBC)에서도 창사특집으로 이 잔치를 방송하였지요. 이렇게 구담정사가 알려지면서 구담정사를 찾는 이들의 발길도 이어져, 아예 제 누이동생이 예약을 받아 한옥체험 행사도 하고 있습니다.
푯대봉으로 향하는 능선 여기저기에는 쓰러진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푯대봉 뿐만이 아니다. 작년 여름 이후 경기도의 산을 오르다보면 이렇게 쓰러진 나무들을 참 많이 보게 된다. 작년 여름 무섭게 불었던 태풍 곤파스의 짓이다. 쓰러진 나무들은 이미 세월을 많이 산 키 큰 나무들이다. 연약한 나무들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바람이 요구하는 대로 몸을 숙이는데, 큰 나무들은 바람에 맞서다가 이렇게 허리가 부러지며 비참하게 쓰러졌다. 강함에는 무조건 맞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때로는 몸을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쓰러진 나무들에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나무들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지난 겨울 동장군이 그렇게 위세를 벌였어도, 나무들은, 꽃들은 겨우내 꽁꽁 속으로 속으로만 숨겨두었던 새잎을 펼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릇 모든 만물의 어린 것들에는 생명의 기운이 토실토실 올라오는 것이 무엇을 보든 다 귀엽기만 하다. 눈앞의 굴참나무에도 새잎은 돋는데, 가지에서뿐만 아니라 두터운 코르크질의 몸통에서도 몇몇의 잎이 돋고 있다. 오랜 세월의 두께를 철갑처럼 두르고 있는 몸통에서 저런 연하디 연한 잎이 뚫고 나온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문득 권이사장님이 어느 계절의 산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산은 어느 때고 오르면 그때마다 그 나름대로의 멋이 다 있기에, 나는 특별히 어느 계절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권이사장님의 질문을 들으면서 눈앞의 어린 새잎을 보자니 만물이 새로 기운을 얻고 움터 나오는 봄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약동하는 봄, 그 봄의 기운이 사방에서 올라오고 있는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자니, 나의 몸도 그 기운 속에 같이 약동한다.
드디어 해발 354m의 푯대봉 정상에 올랐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등산객은 한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모처럼 한적한 산행이다. 이 산줄기를 계속 타고 가면 매곡산을 거쳐 중미산으로 가게 된다. ‘푯대봉’ 여기가 무슨 푯대가 된다고 푯대봉이라고 한 것일까? 눈앞으로 북한강이 흘러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고 있는데, 서쪽으로 기운 해는 두물머리의 한강물을 붉게 데우고 있다.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북한강 건너에선 문안산과 운길산이 역시 이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권이사장님은 원래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다. 늘 한복을 입고 다니시고 선비 같으신 분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증권맨이었다니 어째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증권맨에서 고전문화원 이사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일까?
양 : 원래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다면서요?
권 : 처음 증권회사에 입사하여 참 열심히 일하였죠. 제가 삼보증권에서 일할 때, 그때는 아직 컴퓨터가 없던 시절인데, 금고 안에 원장(元帳)이 계좌번호 순서로 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이를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어느 토요일에 혼자 남아 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데 저녁 10시 30분쯤에 지점장님이 우연히 사무실에 들렀다가 원장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지점장님은 젊은 직원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하여 원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저에게 만원을 주고 가셨습니다. 당시 제 월급이 4만원 할 때였었죠. 이렇게 잘 보이니까 그 뒤로 지점장님은 저를 특진시켜주시고 가는 곳마다 저를 데려갔지요. 그래서 제가 30대에 중후반에 지점장을 할 수 있었구요.
양 : 45살에 증권회사를 그만두셨던데, 왜 한창 잘 나갈 때 그만두신 건가요?
권 : 제가 증권회사에서 어느 정도 이룰 것은 이루고 나니까 제 타고난 그릇에 이 정도인데,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다간 증권에서 못 벗어난다는 생각에 증권회사를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가 안동 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사람들이 저보고 안동양반, 안동양반 하는데, 과연 제가 우리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생각해볼 때에, 제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도 작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화가 근대화 과정에서 불과 4-50년 만에 처절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뭔가 새로운 정신적 돌파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생 후반기를 우리 문화를 찾고 우리 문화 지킴이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사표를 제출하니까 회사에서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 내용증명으로 회사에 사표를 보내기까지 하였었죠.
양 :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권 : 제가 성균관대학교 다도대학원에서 차 교육을 받는데, 윤경혁 원장님이 강의를 오셨습니다. 그렇게 윤원장을 알게 되어 그분이 운영하는 종로 ‘만시당(晩始堂)’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중, 윤원장님과 의기투합하여 만시당을 사단법인으로 바꿔 국어고전문화원으로 등록하였는데, 저보고 이사장을 하라고 하여 지금까지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양 : 국어고전문화원의 취지는 무엇입니까?
권 : 우리의 전통 기록문화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세대들은 한문을 몰라 전통문화와 단절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문도 한글처럼 우리의 국어로 교육하고 써야 합니다. 한자는 원래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황하문명을 이룬 동이족의 문자이므로, 이 또한 우리의 국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국어와 고전문화를 공부하고 사용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자 국어고전문화원을 설립한 것이죠. 그러다가 한국고전번역원의 성백효 교수를 만나 성교수님과도 뜻이 통하여 같이 해동경사연구소를 설립하고 여기도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양 : 아! 해동경사연구소 이사장도 맡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해동경사연구소는 무슨 연구소입니까?
권 :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말하고, 경사(經史)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경서와 사서를 연구 번역하는 사업을 벌이고, 동시에 이를 번역할 수 있는 번역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청소년, 어린이들에게 전통 예절을 교육하고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전통 문화를 현대에 접목시킨 의례준칙도 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양 : 그런 이사장을 맡고 계시니 권이사장님도 한학에 대해서는 해박하시겠네요.
권 :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을 배울 정도로 한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 있었다고 하겠죠. 그러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를 찾아 나설 때에 성백효 선생과 조순 박사님을 만나면서 제 공부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 제가 한복, 한옥 등 우리 문화 지킴이로 알려지면서 강의 해달라는 곳도 많아졌는데, 그러다보니 더욱 더 공부를 안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동을 안내하면서 안동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나아가 안동이 낳은 성현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게 되었죠. 이렇게 우리 문화에 대한 공부에 힘을 쏟다보니 술, 담배도 끊게 되고, 골프, 고스톱 같은 잡기(雜技)도 손을 놓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오로지 고전 공부에 열중합니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오른쪽으로 나타나는 계곡을 보면서 ‘저리로 올라왔던가?’ 하며 눈여겨보나 아니다. 내려가며 나타나는 계곡에 또 눈을 크게 뜨며 보나, 역시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올라왔던가? 드디어 아까 기어 올라온 계곡과 만나는 능선까지 왔다. 아까 올라올 때에는 오직 눈앞의 오름길에만 신경 쓰며 능선까지 올라왔지만, 지금은 쉽게 저 계곡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지나쳐 계속 능선을 내려간다. 가다보니 초은당의 머리가 힐끗 보인다. 권이사장님은 초은당에 국악인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멋진 한복을 입고 선비춤을 추기도 한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냥 보고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우리 춤을 추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양 : 선비춤은 어떻게 배우시게 되었어요?
권 : 내가 어디 강의를 가더라도 사람들에게 우리 춤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으려면 내가 직접 춤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명인(名人) 박경랑 선생한데 선비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춤을 추다보니 마음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옛날에 훌륭한 통치자가 되려면 예(禮)와 악(樂)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알겠더라고요. 지금은 거문고와 서예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창덕궁 소극장에서 권이사장님이 박경랑 선생과 어울려 선비춤을 추던 것이 생각이 난다. 그 옛날 기생으로 분한 박경랑 선생이 권이사장님에게 다가가 하얀 속치마를 펼치니 권이사장님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속치마에 '同行'이라는 글씨를 썼었지. 그리고 권이사장님이 일어나 박경랑 선생과 어울려 선비춤을 추었고... 머릿속에 선비춤을 그리니, 떠오르는 임병걸 시인의 시 ‘선비춤’.
합죽선 감아쥐고
흰 무명 저고리에 두루마기
다소곳이 의관 갖춘 선비
풍악소리 울리자
수줍은 까치발 앞으로 한 발 두 발
뼛속까지 새겨진 선비 문신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내더니
묵직했던 어깨에서
날렵한 날개 쫙 펴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합죽선
그 바람타고 온 몸 달아 오른 선비
한발로 껑충 뛰어올라
허공에서 몸을 돌며 두 다리 벌리니
하늘을 찌르는 사대부의 호연지기
단전에 온 힘 모으고
선비의 체통, 군자의 품위
잃지 않으리라 마음 다잡아보지만
신명에 빠져든 팔다리
마음에서 멀어져
겅중겅중 성큼성큼
영혼까지 옥죄던
선비의 멍에
합죽선 바람에 다 날려버릴 즈음
턱을 잡아당기는 검은 갓끈
번쩍 드는 정신 부서지는 나비의 꿈
마음대로 놀던 팔다리 어깨
슬그머니 잦아들고
다소곳이 접히는 부채로
기어드는 파계의 유혹
이제 능선을 조금 더 지나치니 오른쪽으로 낙엽이 수북이 쌓인 가파른 길이 보인다. 여길 지나쳐 계속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북한강에 코를 박고 멈춰 선 능선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파른 길 밑으로 건물 신축중인 공사현장이 보이는 게 조금만 고생하며 내려가면 될 것 같다. 조심한다고 하였지만 두텁게 쌓인 낙엽층이 내 발바닥을 살짝 미끄러뜨려 엉덩방아도 한 번 찧어야 했다. 마침내 공사중인 건물 옆으로 하여 길로 내려서 초은당으로 발길을 향한다. 권이사장님은 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오면 우리 문화를 찾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내 머리 속으로 우리 ‘한’ 브랜드가 세계를 주름잡는 영상이 기분 좋게 펼쳐지는데, 눈앞으로 다시금 기와선이 멋지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초은당의 모습이 다가서고 있다.
자료출처 --> 양승국변호사의 세상이야기
'국악인 이야기 > 권오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의 양평 한옥 초은당 (0) | 2012.01.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