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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민의 국악세상/국악칼럼

재주와 끼가 넘치는 윤진철 명창



<삶과 꿈 07년 5월호>  최종민(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광주 MBC에는 ‘얼씨구 악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9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방영 중인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한 진행자가 윤진철 명창이다.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와 막힘없는 소리실력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고제 판소리를 많이 연구하고 재현하는 윤명창인지라 소리라면 어떤 소리도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폭넓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광주시립국극단이 ‘창극 쑥대머리’를 할 때는 주인공 임방울 역을 하기도 하고 가끔 서울에 올라가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그 동안 상도 많이 받았다. ‘98년에 제25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을 받았고 ’05년에는 KBS 국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 ‘06년에는 판소리 적벽가로 대한명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많은 활동을 하며 판소리 저변확대에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쌓아가는 윤진철명창이다.

윤진철은 1964년 목포에서 평범한 가정의 3남1년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했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시립국악원에 나가 김흥남사범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6,7년 그렇게 배우면서 공부욕심이 생겨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의 김소희명창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가는 윤진철은 본인이 그린 그림 한 점과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 한 점을 선생님 앞에 내 놓으며 “저는 돈이 없어 학채를 낼 수 없으니 이것을 받고 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 때부터 김소희선생은 윤진철을 제자로 받아드렸고 선생님 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하게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공부한 진철은 자연스럽게 김소희선생이 출강하던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계속 서울에서 대학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목포로 내려와 어린 제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 때 가르친 제자 중 하나가 친구의 동생인 오정해였다. 중학교 1학년인 오정해는 윤진철이 판소리를 배웠던 김흥남에게 배우고 있었는데 서울물을 먹으며 공부한 윤진철이 봤을 때 어딘지 촌티가 나는 소리를 했다. 그런 오정해를 가르치고 다듬어서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대회에 내 보냈는데 중학교 2학년인 오정해가 고등학생까지 있는 학생부에서 장원을 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런 오정해를 보고 김소희선생님이 “저 애 나 도라(달라)”해서 오정해를 김소희 문하로 보냈다.  오정해에 이어 조주선도 가르쳤다. 지금 국립국악원에 있는 조주선도 윤진철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목포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의 하나다.

윤진철은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전남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정권진명창을 찾아갔다. 중2 때 찾아갔을 때엔 “소리하지 말고 돈 버는 길로 가라”고 하셨던 분이었는데 정권진의 음반을 듣고 다 외워가지고 찾아간 윤진철의 소리를 들어보고는 “너 소리하면 되겠다. 소리해라”해서 정권진의 제자가 되었다. ‘85년 다시 전남대학교 국악과에 들어가서 한 참 공부에 재미를 붙일 만 했는데 ’86년 정선생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도 3년 동안 정권진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정선생은 “옳게만 가르쳐라”하시면서 소리 가르치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동창, 여창, 남창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주었다.

동창은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방법이고 여창은 여자에게 가르치는 방법이다. 어린이가 하는 판소리와 여자가 하는 판소리는 목이 남자의 목과 다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이 달라야 한다. 그런 것까지 가르쳐준 정권진 선생님 덕분에 지금 윤진철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윤진철은 가르치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 같다. 20세 전후에 오정해 조주선 같은 제자를 가르쳤고 지금도 40여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에 살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서울 올라가서도 가르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전남도립국악단에 근무한 적이 있지만 그는 끊임없이 제자를 양성하고 국악운동을 펼치며 살았다. 광주지역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귀명창을 키우는 울림 창악연구회’를 만들어 주2회 실기와 이론을 4개월 단위로 가르쳤는데 7,8년 동안에 3천명 가령의 회원이 확보됐다. 그런 국악운동은 광주에 귀명창이 많이 늘어나는 변화를 가져왔고 MBC에 ‘얼씨구 악당’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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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철은 그 때부터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국악을 재미있고 쉽게 알도록 진행했다. 아예 내용 자체를 해학적인 주제로 잡아 전체를 웃으며 보고 즐기게 만들었다. 그 프로그램 덕에 광주에는 국악의 저변인구가 늘어나게 됐고 윤진철은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윤진철이 스스로의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독공(獨功)의 기간을 꾸준히 가져야 대성할 수 있는 것이다.

윤진철은 해마다 겨울철이면 화순 동복에 있는 정수사에 들어가 석달정도 독공을 한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산공부도 하지만 반드시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독공의 기간을 가진다. 독공을 할 때면 정권진선생의 음반을 자주 들어보는데 선생의 소리를 들으면 목을 어떻게 쓰는지, 힘은 어떻게 주는지, 호흡은 어떻게 하는지, 성음이 어디서 나와 어디를 울리며 나오는지 등을 느끼게 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것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나서 소리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네 소리가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해 주었다. 또 고음반을 들으며 연구하는데 옛날 명창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목 쓰는 방법이나 소리하는 속도, 표현하는 방법 등이 요즘 소리와 다르다. 방울목을 쓴다든지 덜미소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들어볼 수 없지만 고음반의 그런 소리를 들어보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윤진철이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하다. 판소리명창으로 무대에서 소리를 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범으로 활동하고, 제자들이 공연하거나 경연대회에 나가면 북 치는 고수역할을 하기도 하고, 전남대학이나 남도대학에 나가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지금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날도 그림 스케치하러 간다면서 행장을 꾸려 떠나는 것을 봤다. 그가 그린 그림을 모아 연말에 전시회를 할 예정이라는 말도 했다. 하여간 재주 있고 부지런한 윤진철이어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될 것이지만 더욱 많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