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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인사동 소식

우리차…투박한 찻잔에 가득 담긴 정성



시린 겨울의 초입…따스한 찻잔의 온기에 몸을 맡긴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제법 맵다. 갑자기 닥친 초겨울 추위에 코는 맹맹하고 목은 따끔거린다. 이런 날엔 뜨끈한 대추차 한잔이 눈앞에 삼삼하다. 약은 약사에게 지어야 하듯, 진득하고도 달달한 대추차는 옛날식 전통찻집에서 마셔야 제격이다. 거기다 인정 많은 주인장이 손수 우리고 달인 것이라며 찻잔을 건네주기라도 한다면, 세파에 찌들고 사람에 상처받은 시린 마음까지 훈훈해질 것 같다. 젊은이들의 거리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 자리한 전통찻집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를 찾은 건 이 때문이다. 가슴 헛헛한 11월 말, 찻집에서 마신 하루다.

  ‘삐그덕 끼익.’

 오전 10시, 낡은 나무 대문을 여는 소리가 시골 외갓집처럼 정겹다. 안으로 들어서는 건 찻집 여직원 조아름씨(25)다. 일한 지 석달 조금 넘었다지만 숙성한 모과차처럼 능숙하다. 그녀의 손엔 오늘도 어김없이 떡이 들려 있다. 근처 떡집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꿀떡이다. 꿀떡은 차를 시키면 딸려 나오는 이곳의 ‘사이드 디시’다. 주말엔 절편, 평일엔 꿀떡을 준비한다.

 조용필은 ‘이른 아침의 그 찻집’에서 외로움을 마셨다지만, 이곳에선 분주함을 들이킨다. 스무평 남짓한 공간에 올망졸망한 탁자 여남은 개가 전부인 찻집이 벌써부터 손님으로 북적인다. 전통차를 맛보려 아침 일찍 부지런을 떨었을 일본 관광객들의 “오이시(*맛있다는 일본말)~” 소리가 반갑다.

 30대 일본 여성 두사람이 주문한 건 유자차와 수정과. ‘달새’ 안주인 정미영씨(45)는 “국적별로 잘 팔리는 차가 있는데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모과차 같은 은은한 맛의 차를, 일본인들은 향이 진하고 단맛이 강한 차를 선호한다”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지구촌이다 싶은 찻집은 점심때를 넘기면서 까만 머리 젊은이들로 하나둘 채워진다.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로 무장하고 강남 번화가를 누비다 막 튀어나온 듯한 신세대들이지만,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품이 의외로 음전하다.

정답게 마주 앉아 오미자차며 생강차를 홀짝이던 경류경(28·성동구 행당동)·이지혜(27·종로구 구기동)·정소영(25·마포구 서교동)씨는 “20대라고 커피나 탄산음료만 마냥 끼고 살겠느냐”면서 “전통차를 마시다 보면 맛도 맛이지만,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이렇게 마음 맞는 이들끼리 종종 들른다”고 말했다.

 청춘들이 떠난 그 자리엔 삐뚤빼뚤 벽낙서 한줄이 으레 남기 마련. “기용♡꽃님 우리 사랑 영원히.” “오미자차 한잔에 5년 전을 추억하고 돌아갑니다, 영준.” “현민 취직! Oh Yeah!”…. ‘삐까번쩍’한 커피숍에 이런 낙서들이 있을까. 무심한 듯 끼적인 글씨에 괜스레 마음이 간다. 꽃님이는 기용이랑 잘 살고 있을까, 영준과 현민은 지금쯤 아저씨가 됐겠지…. 낡고 오래된 전통찻집만의 매력이다.

 오후 3시, 생강의 알싸한 향이 코를 자극하고 대추의 단내가 침샘을 또 한번 자극한다. 주말에 쓸 차를 주방에서 미리 끓이는 냄새다.

붉은 대추에 물 붓고 한소끔 끓인 다음, 과실을 손으로 으깨면서 씨와 껍질을 골라 내는 걸 보자니 입안에 고인 침이 못 참겠는 듯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

 “솔직히 중국산도 써봤지만 영 맛이 안 납디다. 폐백용 씨알 굵은 국산 대추여야지 제맛이 나더라고요. 생강도 국산만 쓰는데 얇게 저며서 두시간 푹 끓인 다음 생강만큼의 흑설탕을 넣고 또 한번 끓인 후 체로 거르면 알싸하고도 달달한 토종 생강차가 되죠. 유자와 모과는 차로 쓸 것을 해마다 이맘때 직접 손질하는데 워낙 양이 많아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차 담그는 날이 우리집에선 김장날보다 더 커요. 유자차는 설탕에 잰 지 1주일만 지나도 먹을 수 있고, 모과차는 6개월이고 1년이고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납니다.”

 정씨의 인상 좋은 남편 이해규씨(45)가 ‘일급 영업비밀’을 한창 알려 주는 동안, 주방 옆 작은 방엔 젊은 엄마 셋이 계피향 같은 구수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들 옆에서 쌔근쌔근 누워 자는 아기들만이 아는지 모르는지 슬그머니 웃는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이제 아름씨가 옷매무새를 단장한다. ‘테이크 아웃’ 용기를 꺼내 확인하고 2ℓ짜리 대추차 원액병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오늘은 날씨가 쌀쌀해서 일찍들 귀가하시겠죠? 그럼 새콤달콤한 테이크 아웃 오미자차가 잘 팔릴 거예요. 시험이다 면접이다 신경 쓸 일이 많은 때다 보니 대추차도 많이 나가겠고요. 긴장될 때 드시면 마음을 진정시켜 주거든요.”

 찻집에서의 초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02-720-6229.

농민신문 김소영, 사진=김도웅 기자 --> 기사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