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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 정은하 명창을 만나다




정은하 프로필

시골소녀는 노래 잘하는 친구가 몹시 부러웠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놓고 몰래 연습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경을 치기 일쑤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아녀자의 바깥출입을 경계했던 선친의 속마음을 이해하게 됐지만….


매일 집을 떠나 도망가는 꿈만 꿨던 소녀는 결국 열여덟 되던 해에 그토록 원하던 소리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소녀도 환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중년이 됐다. 그러나 잊혀가던 우리 민요는 그의 입과 귀 덕분에 오롯이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정은하(57) 명창이 ‘인생을 민요에 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명창 이창배`안비취 선생과의 인연

“제 피 속에 소리꾼의 DNA가 있었나 봅니다. 사춘기 때는 스스로도 노래를 참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요.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평생 노래 부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신 적이 없지만 목청 좋다는 말씀은 많이 들으셨거든요. ‘삼국지’나 ‘옥루몽’ 같은 소설을 창 하듯 읽으시는 소리를 들으려고 동네 사람들이 저희 집 사랑방에 새벽까지 모여 있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빠들도 노래 잘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정은하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회장은 완고했던 선친의 뜻에 따라 제대로 된 소리 공부를 일찍부터 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거나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상스럽다는 이유로 늘 치마만 입고, 고추장`마늘`양파도 먹지 못한 채 자랐다. 셋째 오빠가 군에 가면서 사준 전축으로 김옥심(1925~1980) 선생의 ‘오봉산 타령’을 듣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기회는 1976년에 찾아왔다. 서울에 있던 큰오빠를 졸라서 찾아간 한 방송국의 ‘민요 백일장’이 계기였다. 2007년 아리랑 20곡을 담아 그가 내놓은 ‘정은하, 영남아리랑의 재발견’이란 앨범에서 최종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정 회장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요 백일장 심사가 끝난 후 키가 훤칠하게 커 보이는 가시내가 찾아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민요를 꼭 공부해야겠심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참 대단한 열의를 가진 적극적인 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경`서도 창 사범으로 가장 권위 있는 이창배 선생님을 소개해줬다. 정은하는 그 길로 이 선생님을 찾아갔고 제자가 되었다. 정은하는 몸이 불편한 이 선생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공부했고, 결국 이 선생님이 운명하실 때까지 늘 선생님 곁에 있으면서 민요를 공부한 최후의 제자가 됐다.” 이창배(1916~1983) 선생은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명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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