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O2/민화의 세계]최고 권력의 상징 용 그림… 때론 위엄있게, 때론 우습게


왕권의 부침에 따라 때론 위엄있게, 때론 우습게

[동아일보] --> 기사 원문보기

새해 벽두 경북 경주시 감포읍 문무왕릉 앞 바닷가 백사장은 해맞이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 어둠을 헤치고 강렬한 기운을 내비치는 태양을 향해 저마다 한 해 소망을 빈다. 모래 위에 켜놓은 촛불 위로 연신 손을 비비며 고개를 숙인다. 무속인들의 징소리는 밀려오는 파도소리 너머로 새벽을 깨운다. 이곳은 동해안에서도 가장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삼국통일이란 기적 같은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에게도 큰 아쉬움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왜구의 침입이었다. 신라는 동해안으로 침범하는 왜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죽음을 맞이할 때 바다의 용, 즉 해룡(海龍)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왕처럼 경주시내에 무덤을 만들지 말고 감포 앞바다 바위에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수중릉이 세워진 이유다. 이 능을 지키기 위해 세운 감은사에는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이 드나들 수 있도록 용혈을 뚫어 놓았다 한다. 이 이야기가 시사하듯 용은 물의 신이자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신이었고, 새해의 소망을 들어주고 삶의 곡절을 풀어주는 행복의 신으로 여겨져 왔다.

○ 제왕의 상징

용이 가진 또 다른 상징은 바로 권력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제왕에 관한 모든 것을 용과 관련지었다.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 했고, 임금이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 했으며, 임금이 입는 옷을 용의(龍衣) 혹은 용포(龍袍)라 했다. 임금이 타는 수레는 용가(龍駕) 또는 용거(龍車)로,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이라 불렸다. 임금이 흘리는 눈물은 용루(龍淚), 즉 ‘용의 눈물’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인 ‘태조어진’(보물 제931호)에선 그가 어깨와 가슴에 용무늬가 있는 곤룡포를 입고 용무늬가 곳곳에 새겨진 용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용의 강인한 이미지를 활용해 임금의 권위를 드높였다.

용은 사실 상상 속의 동물이다. 그 모습부터가 사슴 뿔, 낙타 머리, 토끼 눈, 소 귀, 뱀 목, 조개 배, 잉어 비늘, 매 발톱, 호랑이 발바닥 등 아홉 가지의 동물로 이뤄져 있지 않은가. 철저하게 ‘만들어진’ 용은 하지만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는 데 용의 이미지만큼 적합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희화화 대상으로 전락

우리나라에서 이런 용의 이미지에 균열이 생긴 것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1598)부터 병자호란(1636∼1637)까지 연거푸 네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자 권력의 화신인 용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철화백자용무늬항아리(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에는 만화에서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용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가리는 아예 톱니 같고 새우의 그것 같은 눈은 아가리 위에 우스꽝스럽게 달려있다. 용을 따르는 구름조차도 흡사 자동차 매연처럼 초라하다. 이 용을 보면 당시 통치자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바닥을 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라를 잃어버릴 뻔한 극한 상황을 겪은 뒤라 국가에 대한 백성의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항아리가 민간용으로 제작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왜 통치자와 권력의 상징인 용을 이토록 희화화했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어려서 전래동화로 접했던 별주부전에도 약간은 허술한 용이 등장한다. 자라의 꾐에 빠져 용궁으로 간 토끼는 간을 숲 속에 두고 왔다고 속여 위기를 모면한다. 용궁을 빠져나온 토끼의 지혜가 빛나지만, 그 이면에는 황당한 주장에 속은 용왕의 어리석음이 있다.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바다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용왕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토끼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무능력한 통치자로 풍자된 것이다.

○ 민심의 바로미터

18세기 들어 왕권이 강화되고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용의 권위도 회복세로 돌아선다. 힘겨운 당쟁 속에서도 강한 리더십이 발휘된 이 시기에는 더는 흐트러진 용의 이미지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림에서도 그 증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왕실 도자기 생산을 맡았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용무늬항아리’(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보면 위엄과 권위를 갖춘 용의 기상이 백자항아리를 지배하고 있다. 용을 이루는 아홉 동물의 특색을 제대로 갖추고 있고, 용틀임의 위세도 매우 강렬하다. 당당한 용의 기운이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고 평가받는 영·정조 때의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세월이 수상해지자 해학적인 용의 모습이 민화를 통해 다시 등장한다. 왕권이 약해지고 서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호림박물관 소장 ‘운룡도’에는 용의 눈물처럼 눈에서 뻗어 나온 더듬이에 사람 모양의 여의주가 걸려 있다. 여의주는 대항 의지를 잃어버린 포로처럼 맥 빠진 자세로 의인화됐다. 용의 얼굴은 약자를 괴롭히는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용의 갈기는 색실처럼 녹·적·황색으로 물들어 있고 가슴은 붉은 대나무 형상이다.

또 이 그림은 용이 주인공인지 구름이 주인공인지 헷갈릴 만큼 장식적인 구름이 용을 감싸고 있다. 물고기 비늘 같은 모양의 구름, 풍수지리도의 산 같은 구름, 둥글게 여울지는 물결 같은 구름 등 모양도 다채롭다. 주역에서는 ‘풍종용(風從龍·바람이 용을 따른다)’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이 그림에서는 용이 구름을 따른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 여기서 용은 빼어난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용의 이미지는 권력에 대한 당시 여론의 향배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