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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이야기/이윤석

우리시대 명인 - 배김새의 정신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이윤석 씨



고성오광대보존회 홈페이지 --> 바로가기

오광대는 탈춤의 다른 이름이다.

탈춤은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그냥 탈춤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에서는 산대놀이로, 낙동강 서쪽은 야류, 그리고 동쪽 지역에서는 오광대라고 했다.

“고성뿐 아니라 통영, 가산, 의령, 합천, 마산, 진주, 김해……. 오광대놀이가 없었던 곳이 없었어. 다들 농사짓고 살 때니 농한기에는 모여서 놀았지.”

이윤석 씨(61)는 고성오광대보존회 회장이자 인간문화재이기도 하다. 다른 곳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희미해진데 반해 특이하게도 고성에는 1920년대 놀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고 1946년에 바로 복원이 됐다.

1956년에 보존회가 생겼고 해마다 한두 번 씩은 공연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하던 고성오광대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얼마되지않은 1964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7호)로 지정됐다.

“문화재법 아니었음 아마 다 사라지고 없었을긴디.”

“고성오광대 놀러가자”


중학교시절, 이윤석 씨는 마을에서 고성오광대 놀이를 하던 허판세 어른을 따라다니면서 풍물을 배우고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제대 후 허판세 선생의“고성오광대 놀러가자”는 말에 보존회에 발을 들였다. 그때 그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의 큰아버지는 본처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아 후처를 들였는데 후사가 없었다. 결국 그가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고, 생부, 생모도 함께 살았다.

스무살이 되던 해, 병중이던 부친의 염원으로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례를 치렀다. 곱디고운 새댁은 덕분에 다섯 명의 시부모를 모셨다. 아이가 둘일 때 남편은 군대를 갔고 제대를 하니 아이가 넷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군대에서‘사람이 되어 온 줄’알았던 남편이 오광대보존회를 들어가겠다니…….

“그때 오광대놀이 하는 사람은 말이 좋아 한량이지‘잡놈’ 소리를 들었지요. 그러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던 거지.”

아내에게 술이나 노름, 여자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천금같은 약속을 하고, 그는 고성오광대보존회의‘심부름꾼’이 되었다. 고(故) 조용배 선생에게 승무와 문둥북춤을, 고(故) 허종복 선생으로부터 말뚝이춤, 허판세 선생에게 원양반, 이금수 선생에게 꽹과리를 전수 받는 등, 고성오광대 전 과장을 이수했고,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문화는 흘러가는 것, 행위만 붙들어서는 안된다

“예전에는 공연 전에 사람들이 모여 각각 배역을 정하고 그 배역에 맞는 탈을 만들어왔어요. 그러니까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말뚝이의 모습도 조금씩 달랐지. 놀이가 끝나면 사람들은 액을 없앤다는 의미로 탈을 모아 태웠어요. 그리고 다음 공연에서는 또 다른 말뚝이가 생겨났지요.”

비판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오광대판에서, 놀이를 통해 경각심을 주고 부조리같이 나쁜 것들은 한데 모아서 소멸하는 행위에는 새로운 희망적인 기원과 염원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의상, 몸짓이 변해갈 수밖에 없다. 전통고수라는 형식에 치우쳐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부정하면‘문화’의 본질과 뿌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윤석 씨 생각이다.

고성오광대의 정신은 ‘배김새’


이윤석 씨는 말뚝이 예능보유자로 말뚝이 춤과 덧뵈기춤을 주로 춘다. 말뚝이 춤은 탈을 쓰고 하지만 자신만의 덧뵈기춤을 출 때 탈을 벗는다. 덧뵈기춤은 6박자의 굿거리장단에 흥이 많은 남성적이고 웅장한 춤이다.

“춤 몸짓 중에 배김새라고 있습니다. 배김이라는 것은 칼을 뽑아 귀신을 후려친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고성오광대의 정신입니다.”

배김새는 내리 배기다, 내리꽂다, 내동댕이치다는 뜻으로 비판정신을 뜻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1만 년 후에도 사람이 바라는 것은 평화롭고 조용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그 행복을 방해하는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몸짓이다.

“살아가면서 부득이하게 당하는 억울함, 부조리하고 부정한 것들을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이 힘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말합니다. 이게 배김새지요.”

한국을 알리는 신명의 몸짓, 오광대

고성오광대는 일본, 대만, 태국, 호주, 체코, 미국 등 세계 각지를 돌며 공연을 한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신명’으로 그들과 소통한다.

고성오광대는 외국공연에서 꼭 기립박수를 받는다고 한다. 극이 끝나면 관객들을 무대로 불러 뒤풀이를 한다. 점잖은 공연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지만 함께 어울리면서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된다. 멋과 흥으로 함께 어우러져 이상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신명이다.

세계민속무용으로 유명한 주디 반자일((JudyVan Zile) 하와이 주립대 교수는 고성오광대를 보면서‘한국의 특이한 몸짓이 있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2003년 이윤석 씨는 세계 각국에서 하와이대로 유학온 학생들에게 6주간 오광대춤을 가르쳤다.

“처음 만나면 큰절인사를 하며‘신명!’하고 외치게 했습니다. 길을 가다 만나면 먼발치에서 또‘신명!’하며 손을 흔들고, 가까워지면 손뼉을 마주치며 또 다시 신명! 그게 통했지요.”

6주 교육이 끝나고 고성오광대 전 과장을 공연했다. 5과장인 제밀주 과장에서 상여가 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관객들이 무대로 나와 상여를 둘러싼 줄에 노잣돈을 끼워 놓느라 상여가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1달러씩 꽂아 놓은 돈이 985달러가 되더군요. 그 돈은 그대로 당시 태풍 매미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한 수재의연금으로 기탁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어려움도 있지만, 그런 보람,그런 재미로 이렇게 사는 거지요. 그래서 이어가는 거지요.”


농부와 춤꾼으로 사는 삶

이윤석 씨는 농부다. 보존회 일과 공연 틈틈이 아내와 함께 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한다. 현재 고성오광대 소속인원은 30여 명인데, 이들의 80%가 농민이라고 한다.

“내일 공연을 하면 구경하는 관객들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즉흥대사도 만들고 그래야 하는디 그게 안된다요. 쎄가 빠지게 일하다가 허겁지겁 옷보따리 짊어지고 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보니, 맥을 이어가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고성에 유일하게 남았던 설성고등학교의 민속반이 사라지면서, 고성오광대에는 30대 청년이 막내다.

“예전에는 공연갈라카면 사람들을 뽑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이 없다니께.”

‘우리 것을 살리겠다’는 말 뿐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고, 지자체나 일반 기업들이 신이나서 문화를 지원할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윤석 씨. 어린이들에 대한 문화교육도 아쉽다. 어릴 적부터 교육하고, 놀이하면서 자연스레 몸으로 문화를 체득하게 하면 성장해서도 우리 문화를 찾을텐데. 된장찌개를 찾는 것처럼.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한해에 1천 명씩 고성오광대 춤사위를 배우러 온다는 사실. 지금껏 전수받은 사람만해도 3만 8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의 신명을 일깨우는 고성오광대. 이윤석 씨는 열린 생각으로 전통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배김새’의 정신을 새겨놓고 있다.

자료출처 --> 웹진 대산농촌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