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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민의 국악세상/국악칼럼

대금산조의 인간문화재 이생강의 삶과 꿈



이생강은 대금산조의 인간문화재로 2005년 제12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은 명인이다. 얼핏 보기에 열심히 노력하고 활발하게 활동한 다른 국악인들과 비슷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걸어온 삶의 역정은 남다른 데가 많다. 이생강은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수덕이라는 분으로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피리나 대금을 어느 정도 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악기가 이것저것 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생강은 어린나이에 악기를 만지고 소리를 내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해방이 되자 이수덕은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명태나 피리 등을 파는 행상이었다.

이 때 어린 이생강의 역할은 아버지를 도와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손님들을 좌판에 모이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는 피리나 소금을 들고 그가 아는 민요가락이나 유행가 가락 등을 불면서 손님들을 모이게 했는데 아버지를 도와 하는 그 일이 조금도 싫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것이 생활이려니 하면서 더 재미있게 더 많은 곡을 잘 연주하려 했었다. 이생강에게 악기는 별다른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몸의 일부와 같은 것이 되었다. 소리를 이렇게도 내보고 저렇게도 내보는 동안 오래 악기를 불어도 힘들지 않는 요령도 알게 되고 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방법도 하나 둘 알게 되었다. 비록 길거리 악사와 같은 생활을 하지만 그에게는 악기를 부는 재미도 있었고 사람들이 악기 잘 분다고 칭찬해 주는 말들이 기분 좋았다. 때로는 한주환 같은 명인이 지나다 한 가락씩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그런 생활이 이어졌기 때문에 10대 후반의 이생강은 신체도 강건하고 악기도 아주 잘 부는 잽이로 성장했다. 부산지역에서 기성의 많은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악사(잽이)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주환에게 대금산조를 본격적으로 배운 것도 이 시기였다. 그렇게 ‘50년대를 보낸 이생강이 ’60년대가 되면 서울로 이주하게 된다. 처음 서울의 생활은 민속악의 대가였던 지영희나 한일섭 같은 분의 집에 가 기거하며 함께 잽이로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특히 한일섭은 작곡능력도 있고 아쟁산조를 처음 만들어 보급한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한 잽이였던 이생강을 창조적인 음악가로 변신하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구음으로 대금가락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구음으로 이조하는 방법이나 작곡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이생강은 실제로 그것을 응용하여 멋진 자기음악을 만들어 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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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지나면서 이생강은 단순한 잽이에서 창조적인 음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후 이생강의 활동은 한국의 음악가로 활동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공연에서 독주자로 활동하고 큰 연회에는 거의 빠지지 않는 연주자가 되었다. 신쾌동, 성금련, 지영희, 김소희, 한영숙, 박귀희 등 기라성 같은 국악계의 선배들과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이 되어 유럽과 미국을 순회 연주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때의 일에 대해 김소희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한국음악을 처음 소개하는 서양의 무대인지라 좀 웅성웅성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 이생강이 나가서 대금을 연주하면 금방 전체가 조용해지고 모두 귀를 기울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주 때마다 이생강을 먼저 내보내어 분위기를 잘 잡게 한 다음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생강의 연주기량은 뛰어나고 청중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는 흡인력은 대단하다.

이생강에 대한 어떤 얘기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는 그냥 대금의 명인이 아니라 대단한 연주자이고 위대한 음악가다. 그는 무엇이든지 음악으로 표현하고 음악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대금산조의 인간문화재이지만 어릴 적부터 불어 온 피리나 소금 등 관악기 전반을 다 잘 연주하는 관악기의 달인이다. 그에게 있어 악기는 음악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생강은 그런 도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이생강이 경험한 음악세계는 대단히 다양하고 넓기 때문에 그는 그가 필요한 만큼의 음악을 연주를 통해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가다. 그래서 무대에 설 때마다 그는 그 상황에 맞는 음악을 멋지게 연출하며 청중들을 감동시킨다.

그는 연중 130회 이상 무대에서 공연을 하지만 똑 같은 음악을 똑 같이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현장에 맞는 현재성이 있는 음악을 본인의 느낌으로 느끼고 연주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물놀이로 유명한 이광수의 공연에 이생강이 섹스폰연주자  베이스 기타 연주자와 함께 연주한 적이 있었다. 이생강은 상황에 따라 피리를 불기도 하고 대금을 불기도 하면서 서로 즉흥적으로 어울려 음악을 만들어 가는데 음량이 큰 다른 악기들을 압도하며 이생강의 음악이 전체를 멋지고 수준 높게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공연을 보는 사람 대부분이 “야 이생강의 음악 참 굉장하다”고 탄복할 정도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그가 과거 이봉조 길옥윤의 섹스폰과 함께 대금으로 재즈 연주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번 공연 역시 놀랄만한 그의 역량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생강은 나와 오랫동안 허물없이 지내며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다. 국악공연에 해설을 하면서 하자고 한 것도 이생강이었다. 일반인들이 국악을 잘 모르니 해설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관행이 지금은 일반화할 정도가 되었다. 또 내가 국악에 대한 강의를 하면 국악의 실제를 연주로 보여주는 연찬이 많았었는데 그 때에도 이생강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이생강은 개런티를 따진 적이 없다. 특히 학생들을 위한 공연이라고 하면 여비만 받고 포항공대까지 가기도 하고 언제 어디든 도와주곤 하였다. 그는 본인이 어렵게 선배 음악가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하고 활동하던 것을 생각하여 지방의 제자들이 오면 자기 집에 재우고 밥 먹이며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고의 스승이 그런 식으로 가르치니 전국에서 제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수도권은 물론이고 대전, 대구, 부산, 마산, 전주, 광주, 제주 할 것 없이 전국에 쫙 깔려있다.  직접 가르친 제자도 많지만 이제는 제자의 제자들이 많다. 그의 음악생활 60년을 기념하는 공연에는 제자 100명이 그의 대금산조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이생강이 음악가로서의 꿈은 어느 정도 달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많은 음악을 직접 연주하여 음반을 내었고 대금으로는 산조의 역사에 해당하는 박종기류 대금산조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완전히 복원하여 음반을 내었고 본인의 대금산조를 1시간 넘게 완성하여 음반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민속악을 한 사람으로서의 소망이 있다. 민속악을 가르치는 멋진 교육기관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주도에 그런 시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